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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청정국토와 환경보살을 향한 힘찬 발걸음

1회 환경주의운동과 생태주의운동은 같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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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관리자 작성일17-01-03 15:39 조회65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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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환경연대의 처음 쓰는 칼럼을 이렇게 강한 변별을 주장하는 글을 쓰게되는 데는 이유가 있다. 필자가 200012월 준비위원장을 맡아 20019월에 수경스님을 상임대표로 한 조직을 출범하면서 최종적으로 단체이름을 불교환경연대라고 정할 때 논란이 있었다. 단체 이름에<환경>이라는 용어가 불교적이지 않고 제한적된 의미를 갖고 있어 본인은 준비위원장으로서 이 용어의 이름은 피하고 싶었다. 그러나 당시 실상사를 중심으로 전국의 환경사회단체들이 힘을 합하여 성공적으로 지리산댐건설을 저지하면서 지리산 살리기운동이 시작된 그 성과로 만들어지는 불교의 환경단체라서 <환경>이라는 용어가 갖는 방편적 실용성 때문에 이름이 <불교환경연대>로 지어졌다. 그러면 왜 환경이라는 용어가 논란이 되는가

 

<공해>에서 <환경>으로

우리나라 본격적인 환경운동이 시작된 1980년대 중반이었고 그 처음의 이름은 <공해추방운동>이었다. 공해는 영어로 <Pollution>으로 표현되며 <공적피해>를 뜻한다. 공해추방운동에서의 인식은 대체로 부도덕한 정부와 권력, 정의롭지 못한 자본의 이익, 그리고 외세의 경제식민지배자들의 반민중적인 정책의 결과라고 규정했다. 그래서 반공해운동은 반정부 반외세 반자본의 성격을 갖는 운동이었다. 그러다 1992년 브라질 리우환경회의를 전후하여 당시 노르웨이의 여성총리인 브루트란트의 보고서 <우리 공동의 미래 Our Common Future>에서 제기된 문제는 단순히 한국가의 공해와 오염, 파괴에 국한 되지 않은 것으로 규정했다. 더 이상 미룰수 없는 기후변화와 오존층파괴등의 문제는 이미 독재권력, 자본의 문제를 넘어서 전지구적인 심각한 문제로 인식하게 된 것이다.

경제발전와 환경보존간의 갈등이 노정되었던 1972년 스톡홀름회의(국제연합인간환경회의)에서 한층 진보한 개념인 <지속가능한 발전> - 환경적으로 건전하고 지속가능한발전 (ESSD : Environmental Sound of Sustainable Development)의 약칭>성장의 한계(The Limits to Growth)”오직 하나뿐인 지구(Only one Earth)”개념이 수용되면서 위기를 극복하는 발전개념으로 채택되었다. 이러한 인식의 영향으로 한국의 환경단체들은 공해라는 표현이 전지구적으로 전개되고 있는 문제의식에 한참 못미치는 이름이라고 판단하여 <공해>라는 용어는 페기하고 <환경 Environment>이라는 이름을 채택하게 된다. 실제 당시 공해추방운동연합이었던 단체가 환경운동연합이라는 이름으로 바꾸고 리우회의에 참여한 것이 바로 그 사례이다. 이후 어느 누구도 현재의 문제를 <공해>라고 표현하는 사람은 없다.

 

<환경>에서 <생태주의>

그러나 환경이라는 용어 역시 그 개념이 인간을 중심으로 하고 이를 둘러싼 자연의 조건, 배경을 뜻하는 것으로 인간중심적이며 자연과 인간을 분리하는 용어로서 자연을 훼손하고 파괴해온 바로 그 사상적 기반에서 이용되는 용어로 비판되었다. 나아가 노동, 경제, 정치, 복지, 여성 등 수많은 사회문제중의 그저 한 분야로서 위치 지워지는 제한적 용어로 깊은 근본원인을 문제삼지 않고 그저 산업주의의 증상으로서 오염의 정화와 복원에만 관심을 둔 개량주의적인 관점으로 비판되었다.

그래서 등장한 개념이 생태주의(Ecology)이다. 생태주의는 자연계에서 생산, 소비, 분해의 윤회와 순환을 설명하는 생태학에 기반하여 만들어진 용어이다, 환경이라는 용어가 인간과 자연을 분리해서 바라보는 사고와는 달리 생태주의는 세계는 분리할 수 없는 상호의존과 상호보완의 순환적세계로 인식한다. 따라서 사상으로서 생태주의는 관계망적 사고, 그물망적사고를 말한다. 불교의 연기적사고, 순환과 윤회의 인식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생태주의는 풍요만을 추구하는 물질중심적이고 직선적으로 수직상승만을 몰두하는 성장지향의 사회를 거부한다. 이는 인류의 절멸을 초래하는 지속불가능한 발전모델이라고 본다. 그리고 <하나뿐인 지구 Only one Earth>라는 자연의 한계, 자원의 유한성을 동의하며 무한한 경제성장은 불가능하다는 <성장의 한계>를 받아들여 지속가능한발전(ESSD)으로의 전환을 강조한다. 그래서 자본주의뿐아니라 사회주의까지도 자연무한주의를 토대로 물질적풍요와 생산력의 고도화를 진보의 척도로 하는 관념을 <위기를 초래한 같은 원인제공자>로 비판한다. 그래서 영국의 녹색당 지도자인 조나단 포리트는 자본주의과 공산주의의 논쟁이 침몰하는 타이타닉호에서 갑판의자를 평등하게 배열하는 것과 다를바없다고 비판하면서 좌-우익의 정치적 스팩트럼을 <초월하라>고 요구한다.

 

<생태주의운동>에서 <녹색운동>, <생명평화운동>으로

생태주의는 위기를 초래한 물질중심의 GNP, GDPProduct(생산량) 중심으로 세계를 서열화하는 천박한 경제주의를 부정한다. 생태주의는 기존의 진보운동의 역사와 그 토대를 공유하고 그 연장선에 있지만 과거의 진보의 노선과 명확히 그 길을 달리한다. 생태주의는 필요(BHN)에 근거한 경제적성장을 중요하게 생각하면서도 정신적 풍요 및 비물질적성장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야말로 <성장의 사회>가 아니라 <성숙의 사회>를 지향하는 것이다. 또한 분리할 수 없는 자연을 끊임없이 가르고 나눈 분리주의적 사고, 특히 이분법적인 인식에 동의하지 않는다. <다양성>의 사고가 바로 그것이다. 또한 국가주의보다는 <풀뿌리 분권화>된 사회를 선호하며, 적정기술, 지속가능한 순환사회를 지향한다. 따라서 생태주의는 환경운동만으로 국한 된 것이 아니며 생태복지, 생태여성주의, 생태교육, 생태마을, 생태농업등 총체적인 세계관운동이며 문명전환운동이다.

사회주의는 보통 적색으로 표현되었다, 이에 상대하여 자본주의는 청색으로 표현되었다. 그러나 이 둘은 모두 무한성장과 생산력중심주의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어 인류에게 희망과 유토피아로 인도할 것이라는 주장과 반대로 실제로는 인류의 위기를 초래한 원인제공자였기 때문에 이 둘을 모두를 지양한다는 생태주의의 사회적 표현을 <녹색 Green>이라고 지칭하며 <녹색운동>으로 불리고 있다.

그러나 녹색운동에는 깨달음과 영성과 마음, 정신의 가치를 포함하지 못하고 있다. 왜냐하면 결국 인간의 정신과 마음의 반영이 우리의 사회이기 때문에 깨달음과 영성의 가치가 함께 하지 않으면 진정한 녹색사회가 될 수 없다고 하여, 이를 포함하여 <생명운동>으로 칭하고 있고 여기에 마음의 평화, 사회의 평화가 동시에 이루어져야 한다는 의미에서 한국에서는 <생명평화운동>이라는 말로 정착되었다. 따라서 생명평화운동은 생태주의를 토대로하면서 녹색과 정신성등을 포함하는 통합적 가치의 명칭이라고 할수 있다.

불교환경연대는 일찌감치 지향점으로 그 첫 번째를 <생명평화운동이어야 한다>고 선언하고 있다. 이처럼 생명평화운동을 기반으로한 다양한 영역중에 환경분야의 활동에 집중한다는 의미에서 방편적으로 환경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으며, 불교환경연대는 그러한 활동의 표현형으로 녹색불교를 기치로 활동을 하려고 한다.

 

유정길 (불교환경연대 운영위원장)